잠을 이루지 못하던 새벽,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그런데 이 생각이 미칠듯 마음에 드는 것일 때가 있다.

꼭 새벽이 아니라도, 혼자 멍하게 있다가 우연히 하나의 퍼즐을 맞추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의 순서가 명확해 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것들이 내 삶을 지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대 진학을 결정할 때 그랬고

지금같은 삶을 사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랬고

제너럴닥터 오픈을 결정할 때 그랬고

그리고, 그와 견주었을 때 전-혀 모자라지 않는 충격으로

오늘 이 시간 (조금 전의 시간)이 바로 그랬다.

너무나 감사한 시간.

그리고 이제 하루 하루의 의미가 더 새로워진다.

기대된다.

넘어야 할 산도 있겠지만, 이 방향은 반드시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야지.

너무나 분명한 사실

1. 인간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2. 인간은 시스템과 서비스를 만든다.

3. 시스템과 서비스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4. 종교도, 문화도 전체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

전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저 충실히 할 뿐"이라는 당초의 원한 것과 목적의식에 더해져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심지어는 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답답한 의료 현실(의료계의 현실이 아니라)에 조금이라도 개선의 여지를 줄 수 있게 하자는

"나"를 벗어난 목적의식 또는 명분이나 가치가 생겼고, 그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료를 할 때, 또는 서비스를 기획할 때, 또는 그저 공상을 할 때조차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소통"이나 "관계"라는 단어들이 포함되는 문장으로 설명되고, 더 나아가 이 단어들이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아가면서

인간 소외, 관계의 피상화, 불행한 인간...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나의 시도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생겨 나고 자라기 시작했다.

나의 머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그러나 이것은 정말 오해라고 믿는다.

누구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특히, 내가 꿈꾸는 것이 인류의 구원은 아닐진대,

인간에 대한 동점심, 애정이 손톱만큼밖에 없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상주의자들, 몽상가들,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수천년에 걸쳐 인간이 온전히 구원받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을 꿈꿔왔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인간이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제 자리에 있고,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그 조차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지성, 평화(일부 지역이지만), 인권은 정------말 짧은 시간, 좁은 지역에 국한된 것이고 그나마도 벽에 부딪혀 더 이상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그게 내 삶이 지속되는 시간중에 올 것 같아 두렵지만) 모든 것이 다시 무너지고 우리는 다시 암흑으로 들어가 생존을 더욱 처절히 걱정하는 때가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SNS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 '이것은 전화가 사람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하던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전화가 생겼기 때문에 인간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과거의 관계는 변화했다. 다른 산업들도 영향을 받아 새로운 분야가 생겨나고, 흥하던 분야는 내리막을 걷기도 했다.

SNS가 확대되면서 분명 이런 일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SNS는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

전화가 많이 쓰이면서

장거리 전화를 통해 장거리 연애가 가능했었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전화로만 사랑을 나누어 결국 결혼한 사람도 있었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 전화로 마지막 인사라도 나눌 수 있었고
너무 멀리 있어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의사가 환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 생명을 살릴 수 있었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러나 인간은 수천년 전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남은 자신을 이해해 주기 바라지만 자신은 이해하기 싫어하고
자신은 사랑받기 원하지만 남을 사랑하기 싫어하고
나눔과 도움을 받고 싶어하지만 주기는 싫어하고
깊은 관계를 원하는 것 같지만 피상적이고, 남을 정말 "타자화", "객체화" 해도 문제 없는 관계를 원하고
기회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미친듯이 노력해야, 이런 속성이 덮어지고,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게 되는데

어떻게 대중의 수준에서 이런 것들이 변화될까?

불가능하다.

...큰 변화가 오고 있지만, 그것은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변화"일 뿐,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차별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오는 등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지리라는 희망은 가지지 않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나는 (불행히도) 그렇게 생각한다.



화평.

분류없음 2010/01/02 17:35
야고보서 3장 17절, 18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나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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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전화로 알려 주신, 잘 기억해 두라는 말씀.

나는 어릴 때부터, 나 스스로는 화평을 불러 오기보다 분쟁을 부르는 것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결과적인 화평은 좋아한다는 큰 모순까지 안고 있었다.

이런 성향이 현실적으로 드러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앞뒤가 정리되고 관계가 정의되기 전에는 평화란 없...

한마디로 독불장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랄까.

원래 (논리적으로라면)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평화를 가져 올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지혜가 그에 미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가는 곳은 논쟁과 불필요한 분쟁이 생기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부족한 점을 알고 있다는 건 다행이긴 한데

내가 진정 화평을 찾으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는 게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화평이라는 건

나에게 너무나 절실하다.


1. 한 마디로 말해, 보는 내내 몰입도 안되고 불편했다. 볼거리는 화려했지만 그다지 참신할 것도, 미안하지만 감동도 없었다.

비유하자면,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미인이라기에 봤는데 투명 화장으로 보이기 위해 화장을 10cm두께로 하고 인위적인 표정을 자연스러운 듯 능숙하게 짓는 사람을 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반드시 밝고, 가늘고, 맑은 것일까?

우리의 감각은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고, 우리의 생각과 감성은 그것에 대해 반응하고 해석한다.

이제는 지고지순이라는 것을 표현하려면 매---우 감각적으로 디자인해서 매우 농축된 표현을 해야만 한다. 순수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온갖 이미지들을 버무리면서, 그것도 매우 감각적으로 말이다.

판도라의 (IMAX로 보지 못했지만 충분히 감동적이었던, 그리고 다시 그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 난 돈을 내고 IMAX로 다시 볼 것이지만)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은, 나에게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가장 불편했던 것은 아마도 얼마 전 District9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차별당하는 외계인들을 일부러 바퀴벌레를 연상시킬 만큼 더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표현한 뒤, 우리가 철저히 그들에게 시청각적 자극으로는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도록 만든, 그리고 난 다음 "무엇이 옳으냐"고 하면서 주인공이 그들에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준 불편한 영화.

2. 아바타는 대중을 타겟으로 지독하리만큼 잘 디자인한 영화라는 건 너무 잘 느껴졌다. 아주 잘 빠진 디자인의 자동차나, 완벽하게 움직이는 놀랄 만한 감각의 전자제품처럼.

만일 아바타가 그냥 아름다운 자연을 이야기하고, 우리도 이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면, 굳이 악인을 내세우고 그들의 잔인함과 몰상식함을 원주민들의 순수하고 자연과 동화되는 생활 방식과 대비시켜가며 옳고 그름의 구도로 끌고가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마음 편하게 잘 보았을 것이다.

전자제품에도 옳고 그름이 없듯이, 좋은 경험만을 제공해 주면 그것만으로도 그 "상품"은 훌륭히 제 가치를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 영화를 제품에 비유하자면, 장인이 장인 정신을 가지고 혼을 담아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해 낸 걸작이 아니라 어떤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통해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품을 단순히 적절한 가격에 소비하러 간 것 뿐이고.

그런데 소비를 하고 제품을 쓰면서 느껴지는 이 기묘한 위화감이라니.

상품을 완성도있게 만들기 위해 어떤 철학적 접근방법이나 노력이 들어간 것을 잘 느끼면서 만족하는 것이었으면 철학과 상품의 좋은 만남이었겠지만, 단순한 제품에 세상의 이치를 다 담아 낸 듯이 폼잡는 모습이랄까. 돈을 벌기 위해 호객하며 기나 도를 아느냐고 묻는 사람들같달까.

3. 이제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모두 그것을 담담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구나 싶었다.

한 10년전의 영화였다면 판도라 원주민들이 숭배하는 여신이나 지성이란 단순히 자연의 힘, 그 별의 힘, 또는 어떤 특별한 에너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일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가 매우 어색하게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이 나무들은 각각 신경 섬유고, 네트워크를 이루어서 일종의 거대 지능과도 같은 것이다.

즉 판도라의 여신은 막연한 대자연이 아니라

거대한 신경 회로로 이루어진 컴퓨터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판도라의 주민들은 그걸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이고.

머리카락에 나와 있는 신경 섬유들로 서로 연결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썼달까.

이제는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여기 여신의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힘이 있걸랑요"

이러면 먹히지 않을테니, 아니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의 회의 시간에서 아마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을테니.

4. 판도라 원주민들의 온갖 짬뽕 문화에 경악을 했다.

아프리카,아시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고대 유럽, 중동 등

거의 모---든 문화적인 "원시" 문화 요소를 다 차용해서 문화라고 표현하다니.

이게 무슨 와우도 아니고 (아니 와우처럼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좀..

아프리카식으로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고 놀다가 북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소리지르며 공격하고, 처참하게 공격당하고 난 뒤에는 중세 성가를 모두 모여 부르는 이상한 꼴은 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5. 결정적으로

나는 원시 문화 또는 정글속에 사는 사람들의 작은 부족 문화라고 해서

우리 현대 사회의 문화보다 좋다거나 서로 사랑이 가득했다거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을 믿고, 자연을 신성시하고, 우리 존재의 약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던 그 시절조차도

인간은 폭력적이었고, 서로를 몰살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랬으며

한 사회, 문화 구조와 집단 내에도 비참한 폭력과 차별과 모순이 존재했다.

물질로 구성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문명이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영화 속의 판도라의 부족사회에서 보여지던 (겨우) 그 정도 수준의 그런 교류와 관계가 있는 사회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그려지고 순수해 보여져야만 할 판도라의 사회, 그 부족이

나는 무섭고 폭력적인데다가 지구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다지, 그들에게 동화되는 주인공에게 그다지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았다.

단지 육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동화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되다 보니 좋았달까.

그리고 그들의 터전이 없어지고 밀려나는 것을 직접 체험하다 보니 화나게 되고, 한계를 넘어 자신도 모든 것을 잃고 오갈 데 없어지니 그들과 하나가 된다..는

구구 절절하고, 따지면 다 좋은 이유이긴 한데

자신의 동료들을 (그들 또한 인간이고 생명인데) 배신하고 죽이는 데에 충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

종합하자면

아바타는 시각적 요소를 잘 만든 수작 영화이지만

스토리도 성의 없었고 (새로울 것 없으니),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계속 진부한 방식으로 넘어갔고

결론이나 교훈까지도 너무 진부한데다가 모순까지 있는

잘 만든 영화였다.

(응?)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제 방영한 SBS 방송의 브라에 대한 내용을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내용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라거나,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진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의학적 지식이 전문가 수준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나 관심이 없이 무덤덤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여성의 필수품이 정작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독약과 같은 것이라니!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매우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들이 브라를 이용하는 이유가 뭘까?

아름다운 가슴선을 유지하기 위해, 몸매를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

옷 위로 성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유두의 그림자가 두드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슴의 무게로 어깨가 쳐지고 등이 아픈 것을 막기 위해

나이가 들면서 가슴이 쳐지고 납작해 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회 활동 중에서 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 등 인구 밀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곳에서 사람들과의 접촉시 힘든 상황을 줄이기 위해

집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동안 신호등이나 버스, 지하철 등의 시간 때문에, 또는 일 때문에 뛰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과도한 움직임으로 인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

이 외에도 아주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여성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어떤 종류의 욕심이나 미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에 해당하는 이유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


제발,


브라를 이용하는 수많은 우리 주변의 여성들이 위의 이유중 어느 단일 이유로 인해 이용할 이유도 없지만

그들이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브라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을 상당 부분 무시하거나 저평가한 채

"브라가 이렇게 건강에 안 좋은데도 왜 굳이 그걸 하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건강을 헤치는지 모르겠다. 이제 사회적 이목이나 미적 욕심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자유를 얻어라. 눈치 보지 말고"

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에 대해 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여성은 불행히도

아직 사회적 약자가 맞다.

지하철을 탈 때도, 밤길을 걸을 때도, 혼자 집 안에 있을 때도

남성들에 비해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수많은 편견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고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브라를 성적 역학 관계, 또는 계급적 관점에서의 상징으로 바라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혹시

"--하면 --가 --% 늘어난다"는 식의 의학적 통계 데이터와 외국의 잘나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견해, 방송에 맞추어 편향된 방향으로 가공된 내용의 실험이나 통계를 통해 얻은 교훈이나 감상이

고작

"그러게 왜 여자들은..."이 아니길 바란다.

아무리 의식이 있고 학식이 높고,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미묘한 의학적-사회적 옳고 그름이 뒤섞인 상황에서는 흔히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자.

그리고 여성들도 혹시 이로 인해 자신에게 미안해 하고 겁먹지 않기를 바란다.

냉엄한 사회적 현실과 의학적 진실이 반드시 배치되지 않으며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브라-노브라에 대해 관대한 사회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의 달성 여부를 떠나,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당신의 건강은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달성되고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